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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사를 하고 본격적으로 쉬게 된 기간으로만 벌써 만 4개월을 채워가는 중이다. 누군가의 기준에서는 짧을 수도 있는 시간이다. 회사를 다니고 있을 때의 나는 몇 달이라는 시간을 꽤 짧은 시간으로 여겼던 것 같다. 출근과 퇴근을 기계적으로 반복하는 하루하루는 권태롭고 무기력했지만 좀 더 넓은 관점에서 바라보면 시간 자체는 빨리 가는 편이었다. 어쨌든 월급 한 번 받으면 한 달이 지나가는 것이고 결과적으로 직장인으로 사는 인생의 시계는 빠르게 움직인다고 느껴졌다. 20년 다니고 명예퇴직(가능하다면)하는 것도 금방이겠구나, 같은 느낌이었다.


그런데 퇴사 후 몇 달은 그렇게 짧게 느껴지지 않았다. 사실 인생에서 이 정도의 시간은 꽤 긴 시간일 수 있다는 것을 요즘 부쩍 체감하는 중이다. 물론 타인의 관점에서 바라봤을 때 중대한 변화라고 할 만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획기적인 돈벌이를 시작한 것도 아니고 무언가를 배우기 위해 학교와 같은 기관에 들어간 것도 아니다. 그냥 읽고 싶은 책을 좀 뒤적이며 시간을 보내고, 평일에 오후 늦게 알바 갈 시간이 되면 간단히 준비해서 일을 하고, 일주일에 한 번 하는 명상 수업에 참석한다. 거의 이게 전부다. 가끔 영화도 본다. 


그래도 나에게 있어 의미 있는 변화가 일어났다고 생각하는 것은, 의도적이진 않았지만 결과적으로 내가 해 왔던 일련의 행동들이 나 자신을 잘 이해하게 되는 데 도움이 되었기 때문이다. 명상을 하면서도 내가 왜 명상 수업을 듣기로 결정했는지 목적이 다소 불분명한 점이 있었고 도서관에서 빌릴 책을 고를 때도 누군가의 추천에 따라 책을 고르기도 했지만 그냥 서가를 돌아다니며 마음이 끌리는 책을 빼서 보기도 했다. 그런데도 그 모든 과정들이 스스로의 내면에 집중하는 시간을 갖도록 하는 (우주적인!) 정합성이 있었던 것 같다. 심지어 알바를 가서 접시를 닦으면서도 그런 생각을 종종 하게 된다. 


내가 스스로에 대해서 재이해하게 된 측면 중 하나는 내가 논리적이기보다는 직관적 판단을 많이 하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이공계열의 전공 공부를 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늘 스스로에게 논리적 사고를 하는(그리고 해야만 하는) 사람이라는 프레임을 씌워 왔던 것 같다. 그러나 실제로 내 인생을 돌이켜 보았을 때 인생의 굵직한 결정을 명확한 근거 없이 감으로 한 경우가 많았다. 심지어는 퇴사 결정도 그의 일환이라고 할 수 있는데, 지난번의 글에도 주절주절 썼듯이 퇴사라는 중요한 결정을 하기 위해 내가 스스로 납득이 가능한 이유들을 마련하긴 했다. 그러나 그 이유들을 종합해 보면 사실 타인의 입장에서는 "그래서 뭐 하고 먹고 살건데?" 라는 의문이 어쩔 수 없이 나오게 되는 것이다. 이 질문은 퇴사를 준비하면서 주변인으로부터 많이 받은 편이고 마땅히 대답할 말이 없었다. 내 퇴사의 이유들은 나 자신을 설득시키는 논리로는 충분했지만 사실 그 근거들은 다소 감상적으로 느껴질 수도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퇴사하기로 한 결정도 내가 그냥 직관적으로 결정한 일 중의 하나로 생각해야 할 것 같다. 그런데 그렇게 생각하더라도 기분이 나쁘다기보다는 오히려 좋아지는 편이다. 퇴사 후 몇 달의 시간은 나에게 충분히 의미있었고 내면을 충전하는 행복한 시간이었음을 도저히 부정할 수가 없을 것 같다. 나는 뭔가 대단한 성공에서 기쁨을 느끼는 사람이 아니고 그냥 이렇게만 살아도 기분이 좋아지는 사람인 것이다. 그런 면에서 내 직관은 내 본성에 맞는 길로 잘 인도해 줬다는 기분이 든다. 저축은 계속 줄어들고 있지만 그렇게 빠른 속도는 아니고 알바도 하고 있으니 그럭저럭 살기가 괜찮다. 앞으로의 시간도 잘 살아보려고 한다. 내 직관을 신처럼 믿어봐야 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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