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인의 추천으로 자코 반 도마엘 감독의 영화 [미스터 노바디 Mr. Nobody]를 보았다. 두 시간이 넘는 러닝타임이 지루하지 않을 정도로 이야기를 보는 재미가 있었다. 인생은 "B(Birth)와 D(Death) 사이의 C(Choice)다"라는 이제는 다소 식상해진 아이디어를 이렇게 흥미롭게 들려줄 수도 있구나, 역시 스토리텔링의 힘은 강력하다. 뭐, 보다 더 깊은 철학적 함의가 숨겨져 있을 수는 있겠지만 굳이 다른 사람들의 리뷰는 찾아보지 않기로 했다. 과거의 선택들이 현재의 나를 규정한다. 우리의 경험은 대부분 선택적이다. 물론 이 세상에 태어나는 선택은 내 것이 아니었지만 머리가 크고 나서는 스스로의 결정으로 인생을 살아가게 된다. 과거의 사소한 선택 하나가 내 삶을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바꿀 수..
삶에서 자연스러움이란 무척 중요하다. 밴드 라이프 앤 타임이 그의 노래 '유니버스'에서 "우리의 입장은 가만히 내버려 두는 것"이라고 한 것 처럼 말이다. 가만히 내버려 두어도 삶과 시간은 자연스럽게 흘러가듯 생각과 행동도 그냥 흘러가도록 내버려 두니 한결 마음이 편해진다. 이케아에서 가구를 사 와서 조립하려고 할 때도 뭔가 억지로 맞춰진다는 느낌이 들 때면 잠시 멈추고 설명서를 다시 들여다 봐야 한다. 방향을 착각했을 확률이 높다. 자연스럽게 조립되도록 디자이너와 엔지니어가 고심해서 만들어 놨을 것이다. 음악에 있어서도 이런 태도를 가지려고 한 지 오래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명반'이라고 하는 앨범과 피치포크가 극찬하는 음악이 꼭 내 것일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라디오헤드의 새 앨범을 들을 때 그것..
첫 수업을 들은 이후 지금까지 인센스 스틱을 세 개 사용했다. 아마도 내일은 집에서 하는 명상을 쉬게 될 것 같으니 이대로 두 번째 수업을 가게 될 것 같다. 확실히 향을 피우니 명상의 집중도가 올라가긴 한다. 스틱에 불을 붙여두면 20분 정도 스스로 타게 되는데 명상 중간에 눈을 뜨게 될 경우 시계를 보지 않고 스틱의 남은 길이를 보고 시간을 가늠했다. 가장 오래 (눈을 뜨지 않고 이어서) 명상을 했을 때가 향이 절반 정도 탄 시간, 즉 10분 정도였다. 명상을 더 길게 하지 못하고 눈을 뜨게 되는 이유는 더 이상 집중이 어렵다거나 참지 못해서가 아니라 단순히 흘러간 시간이 궁금해서였다. 이 정도 했으면 꽤 오래 한 것 같은데 15분 정도는 지나지 않았을까? 주로 이런 식으로 눈을 뜨고 시간을 확인했다..
웨스톤(Westone)사의 이어폰 몇 가지를 청음해 보기 위해 청담동에 있는 청음샵 셰에라자드에 방문했다. 나는 음향기기에 수백, 수천을 투자할 만큼의 오디오필은 아니지만(그럴 여유도 없다) 기본적으로 좋은 소리를 내주는 기기에 대해 관심은 많은 편이다. 지금보다 예산이 더 부족했던 대학생 시절에도 이어폰을 하나 사기 위해 인터넷으로 이런 저런 정보를 검색해 보던 기억이 난다. 그 때는 골든이어스와 같은 사이트에 들어가서 도통 이해가 되지 않는 측청치를 쳐다보다가 결국은 포기를 하고 디씨인사이드의 이어폰, 헤드폰 갤러리(이헤갤)에 들어가서 어떤 이어폰이 가성비가 가장 좋은지를 찾아보고 구입했던 것 같다. 지금에 와서야 느끼는 거지만 주파수별 응답 곡선이라든가 플랫(flat)한 사운드라든가 하는 것이 오디..
서울에 올라와 혼자 살기 시작할 무렵부터 생긴 버릇이랄지 감성같은 것인데, 밤 늦은 시간에 승객이 많지 않은 버스를 타고 좌석에 앉아 집으로 가다 보면 알 수 없는 감정 상태에 빠지곤 했다. 낭만과 불안이 뒤섞인, 표현하기 어려운 감정이었는데 그 기분은 차선 건너편에서 마주오는 차들의 헤드라이트 불빛을 바라보며 더 강화되곤 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잘 알지 못하는 도시에 혼자 살고 있다는 사실을 환기시켜주는 종류의 경험이라 그랬던 것 아닐까 싶다. 사실 그것은 썩 나쁘지 않은 기분이었기 때문에 그 무드를 활용하여 공상이나 사색에 잠길 때가 많았다. 지금은 밤에 버스를 타도 별다른 기분이 들진 않는다. 그 때의 나는 음악을 많이 듣는 편은 아니었는데 20대 중반 이후에 알게 된 벨 앤 세바스찬(Belle ..
퇴사를 하는 이유는 다양하겠지만 나와 같이 별다른 계획 없이 실행하는 경우는 드물 것이다. 보통은 더 나아 보이는 직장으로 이직을 한다든지, 개인 사업을 시작한다든지 하는 이유 하나쯤은 있기 마련이다. 번듯한 직장을 왜 그만두냐고 주변에서는 우려하지만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퇴사를 생각하게 되는 것 같다. 극심한 취업난 속에서 누군가는 안정적인 직장을 가지기 위해 노력하지만 막상 돈을 벌기 시작하면 그것과는 또 다른 고민이 생긴다. 자신이 처한 입장에 따라 고민의 양상도 달라지는 것이다. "회사나 가고 싶다"가 "회사 나가고 싶다"로 변하는 순간이 필연적으로 생긴다. 이유는 참 복합적이다. 조직 생활도 싫고 내가 깨어있는 시간 대부분을 회사에 들이붓는 것도 싫다. 월급날 오전에 통장에 찍히는 금액을..
첫 명상 수업을 위해 삼성동으로 가는 버스를 탔다. 인스타에서 사진으로 본 명상센터의 모습들을 머릿속에 떠올려 보며 다소 혼잡한 퇴근 시간대의 풍경을 멍하니 바라보다 보니 금방 근처에 도착할 수 있었다. 문자메시지로 안내 받은 주소의 건물을 찾아가 4층으로 올라갔다. 센터 내부는 온통 흰색으로 센터 바깥과는 문 하나를 기점으로 완전히 다른 공간이 펼쳐지는 느낌이었다. 깨끗한 실내 때문인지 공기도 상쾌한 기분이었는데 둘러보니 발뮤다 공기청정기(이것도 흰색이다)가 열심히 일을 하는 중이었다. 데스크처럼 보이는 장소에는 흰색의 도복을 입은 두 명의 직원이 접수를 도와주고 있었다. 수업 첫 날이라 수업료를 결제해야 했다. 앞으로 두 달, 무언가 긍정적인 변화가 있을 것을 기대하며 등록을 했다. 수강 규정을 읽어..
무라카미 하루키를 처음 읽었을 때가 떠오른다. 20대 초반 군생활을 하던 때였는데 내무실에 놓여 있었던 를 발견하고는 집어 들고 읽기 시작했다. 워낙 유명한 책이라 제목은 알고 있었지만 그 당시의 기억으로는 소설인데 야한 장면이 많이 나온다는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은 바 있어 그러한 호기심이 독서의 동기가 되었던 것 같다. 그렇게 다소 불순한 동기로 읽기 시작한 책은 놀랍게도 내 20대에 가장 영향을 많이 주었던 책이 되었다. 전역하기 전까지도 여러 번에 걸쳐 읽었고, 책에 나오는 위태롭고 허무하지만 낭만적인, 그렇게 뒤섞인 감정이 이야기에서 나에게로 전이되었다. 20대 후반에 이르러서는 그러한 감정들이 많이 흐려지기도 했지만 어쨌든 나는 젊은 날에 그 이야기처럼 살고 싶었던 것 같다. 30대를 시작..
방에서 가만히 앉아 음악을 들을 때 사용하는 스피커가 있다. 음향기기 매니아들의 입장에서 보기엔 별볼일 없는 스피커일지 모르지만 내 입장에서는 나름 적당한 돈을 들여 구매한 것으로 꽤 만족하며 사용하고 있다. 저녁 시간 이후에는 스피커의 볼륨을 키우기가 곤란하므로 퇴근 후의 시간에는 속시원히 볼륨을 올려보지 못했다. 지금은 낮에 마음껏 음악을 들을 수 있으므로 원하는 만큼, 조금은 과하다 싶을 정도의 볼륨으로 음악을 감상하곤 한다. 볼륨을 한 칸 올리면 훨씬 좋아지는 음악들이 많다. Two door cinema club의 1집 [Tourist History]를 방을 가득 채우는 사운드로 들어보니 꽤 만족스럽다. 이어폰으로 들을 때도 좋았지만 스피커로 들으니 역시 다른 맛이 있군, 하고 고개를 끄덕여본다...
친구가 전달해 준 창백한 푸른 점(Pale Blue Dot)에 대한 자료를 보았다. 보이저 1호가 1990년 2월 14일에 지구를 바라보고 찍은 사진의 이름이라고 한다. 사진의 이름이 창백한 푸른 '별'이 아니라 '점'인 것은 제목 그대로 사진에서의 지구는 아주 작은 하나의 점으로만 나타나 있을 뿐, 우리가 알고 있는 어떤 지구의 형태도 알아보기 힘들기 때문이다. 아주 멀리서 바라본 지구의 사진이다. 우주에서 보면 지구는 하나의 점에 불과하다. 종종 떠올리는 문장이지만 사진으로 보니 그 사실은 새삼 새로워진다. 그 작은 점조차 나에게는 거대한데 나는 그 점의 표면의 아주 티끌같은 공간을 하나 차지한 채 먼지처럼 앉아 있다. 나는 훅 하고 부는 바람에 쉽게 날아가버릴 정도로 미약한 존재이다. 별이라고 하면..